2000년대 이후
19세기 말 우리나라 과학사의 첫 문을 여는데 감리교와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3일 서울 종로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에서 미연합감리교 세계선교부 유지재단 주최로 열린 포럼에서다. 이날 포럼은 ‘연합감리교 한국선교의 계승과제’를 주제로 진행됐다.
‘과학·감리교·윤치호’ 등 언뜻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주제를 엮은 건 민태기(에스엔에이치 상무 ) 박사였다. 최근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을 펴낸 민 박사는 ‘윤치호 일기로 본 감리교 선교와 한국 과학의 태동’을 주제로 발제했다. 민 박사는 ‘혁명과 낭만의 유체 역학사’라는 부제가 붙은 베스트셀러 ‘판타레이’도 썼다.
공학박사이면서도 역사에 조예가 깊은 민 박사는 윤치호가 꼼꼼하게 썼던 일기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윤치호의 1899년 2월 1일 일기를 보면 ‘송도(개성)에 산업학교(industrial school)를 만들기 위해 감리교 재단에 기부한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이를 계기로 1906년 만들어진 학교가 훗날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가 되는 ‘한영서원’이었고 이 학교의 맹활약으로 현대 물리학의 주요 인물들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민 박사는 “윤치호는 양반들이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노동하지 않고 입으로만 떠드는 걸 혐오해 이공계 학교를 세웠다”면서 “을사늑약 이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 윤치호는 한영서원 교장이 됐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의 이력이 화려하다.
민 박사에 따르면 “윤치호의 아들과 친하게 지냈던 개성의 한 가난한 소년이 한영서원에 입학했고 이 학교 졸업 후 윤치호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1932년 미시간대학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바로 최규남 전 서울대 총장”이라면서 “일본 도쿄제국대 물리과를 졸업한 도상록은 송도고보 교사로 부임했는데 이때 출판한 논문 중 우리나라 최초의 양자역학 논문이 있었다”고 말했다.
최규남은 1952년 6·25전쟁 중 부산에서 ‘한국물리학회’를 창립했고 안타깝게도 월북한 도상록은 북한 핵물리학을 이끌었다.
민 박사는 “이외에도 나비 박사 석주명,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모두 이 학교 출신이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민 박사는 “감리교 선교사 아서 베커가 연희전문학교에 수물과를 만들었는데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천문학)과 교토제국대학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한 박철재가 이곳 출신이었다”면서 “이쯤 되면 한국의 초기 과학사는 감리교와 윤치호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