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후
▲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식 기념사진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식의 마지막 순서로 참가자들이 단상으로 나온 가운데, 최승회 이사장이 창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
ⓒ 강승혁 |
항일혁명가·노동운동가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가 지난 4월 30일 오후 4시, 서대문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의정원 홀에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날 출범식에는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 권낙기 4.9재단 대표,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 이사장, 권영길·단병호·남상헌·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 최순영·홍희덕 전 국회의원,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덕우 전태일재단 이사장, 배성동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대표, 김세균 교수, 강승규, 이성재, 김태일 등 각계 사회 대표와 고 김금수 선생의 유가족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출범식에 앞서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노동자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광복 10개월을 남기고 고문 후유증으로 애석하게 옥사한 이재유 선생의 삶을 다룬 영상 KBS '역사저널 그날'이 상영됐다.
▲ 진행하는 김명환 김명환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장이 이재유기념사업회 출범식의 사회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
ⓒ 강승혁 |
출범식은 김명환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회로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저자인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기고 글 낭독, 문진오 민중가수의 기념공연에 이어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창립선언문 낭독의 순으로 진행됐다.
▲ 박중기 이사장 축사 이재유기념사업회 출범식에서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
ⓒ 강승혁 |
이날 축사에서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은 "이재유 선생은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대부분이 그랬듯이 계급 문제에만 매몰되어 민족 문제를 등한시 하지 않았다. 이재유 선생은 노동운동을 통해 반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였기에 민족 문제와 노동 문제를 결합할 수 있었다"면서 "오늘날 이 땅의 노동운동가들도 이재유로부터 다시 배울 점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이재유가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듯이 우리도 권력과 자본에 맞서 거침없이 싸워야 한다. 이재유 선생이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를 결합해 항일투쟁을 했듯이, 우리도 분단된 상황에서 외세에 맞서 통일운동에 똑같은 힘을 써야 한다"며 "이재유 선생은 삶과 투쟁 그리고 사상과 노선 등 놀랍고 의미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가 이재유 선생의 다양한 방식을 기반으로 이재유 선생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작업을 왕성히 펼치기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 전태일재단 이덕우 이사장 이덕우 이사장이 "이재우선생의 정신이나 전태일 열사의 정신은 '다함께 더불어 잘살자'로 같은 것"이라며 "두 분의 뜻을 계승해서 세상을 바꾸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
ⓒ 강승혁 |
이어서 축사에 나선 이덕우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이재유 선생에 대한 여러 이야기로 유추해보면 선생은 치열하게 싸우고 목숨을 바치며 살았으면서도 따뜻하고 눈물 많은 분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며 "이재유 선생이 돌아가신 1944년부터 26년이 흐른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40년의 나이 차이와 26년 세월의 차이가 있지만, 이재유 선생께 제사 공장 대규모 공장의 여공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돈에 창녀촌으로 팔려 가는 여성들이 있었다면 전태일에게는 평화시장의 13살, 14살, 16살 어린 시다들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더불어 잘 살자'라는 이재유 선생과 전태일 열사의 뜻을 계승해서 우리가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서 이 세상을 좋게 바꿔 나가는 데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 김진억 민주노총 서울본부장 김진억 서울본부장은 축사에서 "이재유 선생은 내가 닮고 싶은 이상향”이라고 말했다. |
ⓒ 강승혁 |
다음 발언에 나선 김진억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은 "이재유 선생은 내가 닮고 싶은 이상향"이라며 "지금 계급해방 노동해방을 위해서 그리고 민족 해방을 위해서 나가야 하는데 '우리가 너무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성의 마음으로 각오와 결의를 다지게 된다. 이 기념사업회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도 함께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어진 창립총회에서는 이원보 고문의 제안으로 최승회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 의장이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으로 추천돼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또한 최 이사장의 추천으로 김명환, 김태을, 김재길, 정문주, 박홍배, 손옥희, 이성재, 정성희 등 8명이 이사로, 공군자(서울노동광장 대표), 연윤정(매일노동뉴스 논설위원)이 감사로 추천돼 선출됐다.
▲ 선출된 임원들의 인사 창립총회에서 이사와 감사로 선출된 임원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 인사하고 있다.좌로부터 김태을, 김재길, 정성희, 최승회, 김명환, 이성재, 연윤정, 공군자 순이다. |
ⓒ 강승혁 |
마지막 순서로 참가자들은 최승회 이사장이 대표 낭독한 창립선언문을 통해 "우리 사회의 운동이 어려울수록 우리 운동의 뿌리를 찾고 선배 운동가의 정신을 되살리는 노력을 함께해야 한다"면서 "선생이 목숨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노동해방, 조국 해방의 정신, 그 치열했던 투쟁 정신을 기리고, 진실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는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이재유(李載裕) 선생은 "1905년 8월 28일 출생, 1925년 開城(개성) 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중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가 퇴학 처분을 당한 후 同年(동년) 渡日(도일)하여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日警(일경)에 체포되어 懲役(징역) 3年 6月[未決(미결) 500日 通算(통산)]을 받고 1932年 12月 출옥한 후, 1933年 7月 朝鮮共産黨再建(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하여 활동하다 1934年 1月 日警(일경)에게 체포되었으나 同年(동년) 4月 탈옥하였다"고 한다.
또한 "1936年 6月 조선의 절대독립, 일본제국주의타도 등을 목적으로 朝鮮共産黨 京城地方協議會(조선공산당 경성지방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1936年 12月 日警(일경)에 체포되어 懲役(징역) 6年[未決(미결) 150日 通算(통산)]을 받고 1942年 9月 刑期(형기)가 만료되었으나 출옥하지 못하고 1944年 10月 옥중에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재유 선생 연보 |
1905년 8월 28일 함남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 출생 1922년 (18세) 상경 1924년 (20세) 4월 사립 보성고보 2학년 편입학, 6월 자퇴 (부친 사망) 1925년 (21세) 4월 개성 송도고보 4학년 편입, 사회과학연구회 조직 1926년 (22세) 11월 송도고보에서 퇴학처분, 12월 도일 1927년 (23세) 사립 일본대학 전문부 입학, 동경대 신인회가 조직한 노동학교 등록 1928년 (24세) 4월 조공 일본총국 위원, 5월 고려공청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 8월 제4차 조공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1930년 (26세) 11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 선고받음 1932년 (28세) 12월 22일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 1933년 (29세) 7월 조공재건 경성트로이카 결성 1934년 (30세) 1월 이순금, 안병춘과 함께 서대문경찰서에 체포, 4월 서대문경찰소에서 탈출하 여 미야케의 동숭동 대학관사에서 은신 1935년 (31세) 1월 이인행, 박진홍, 박영출 체포, 신당동의 아지트에서 탈출, 양주군 노해면 공덕 리에 정착 1936년 (32세) 6월 조공재건 경성준비그룹 결성, 적기 1, 2, 3호 발행, 12월 25일 양주군 노해면 창동에서 체포 1938년 (34세) 7월 징역 6년 선고 1944년 (40세)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 |
▲ 출범식 포스터 이재유기념사업회 출범식을 알리는 포스터 |
ⓒ 이재유기념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