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학입시에서 '봉사'는 점수로 반영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 남자고등학교의 봉사 동아리 경쟁률은 23:1에 이른다. 3차 면접까지 본다. 동아리 활동 기한은 무한대다. 졸업한 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동아리원'으로 남는다.
인천 연수구 송도고등학교 과학봉사동아리 'SCV(Science Club Volunteer)' 얘기다. SCV는 과학 키트를 직접 개발한다. 개발에 그치지 않고 대학 병원에 입원한 환아들과 함께 과학활동을 진행한다. 이 봉사를 준비하기 위해 12명의 학생들은 점심을 5분만에 흡입하고 학교 연구실로 향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교내에서는 혈액관련 난치질환 환아들을 위해 조혈모세포 인식 개선 체험부스를 운영한다. 교외에서는 재활용품을 활용해 태양광 키트를 개발해 지역사회 친환경에너지교실을 운영한다.
공부할 시간까지 할애하며, 봉사를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SCV'를 12년간 이끌어 온 장유리 선생님과 동아리원으로 활동 중인 김한민(2학년), 배성호(2학년) 학생을 지난 7일 인터뷰했다.
▲ 장유리 선생님과 SCV 동아리원 단체사진
ⓒ 장유리
인하대병원 8층에 있는 아동병실 문을 열다
장유리 선생님이 송도고에 처음 온 2011년 당시 학교가 과학중점학교로 선정됐다. 이때 장 선생님은 SCV를 만들었다. 처음엔 복지관에서 하는 일회성 봉사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정기적인 봉사활동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리고 장 선생님은, 한 학생의 말 한마디에 인하대병원 아동병실에 전화를 걸었다.
"한 SCV 학생이 자기가 어렸을 때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있었는데 병원에서 동화구연, 그림 그리기 수업은 많았대요.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과학 관련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었다고 환아들에게 과학 봉사를 해보고 싶다더라고요."
인하대병원의 첫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고등학생 봉사는 시간 채우기용으로 하고 스펙 다 쌓으면 바로 사라진다, 그러면 환아들은 상처를 받는다"는 이유였다. 장 선생님은 "송도고는 사립학교라서 제가 여기를 떠나지 않고, 쭉 책임지고 활동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병원의 우려는 또 있었다. 전문성이 없는 학생들의 봉사활동을 허가했을 때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장 선생님은 병원 안전 수칙을 교육 프로그램화해서 인하대병원의 검토를 받았다. 병원 봉사 전 날에는 선배와 후배가 2인 1조로 짝이 되어 시뮬레이션을 했고, 안전성이 확인된 키트만 가져가겠다고 했다.
결국 첫 봉사가 이뤄졌고,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과학 키트라고 하면 보통 시중 키트를 사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SCV는 자체 제작을 통해 환아들의 관심사를 키트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봉사를 갔는데 아이가 공룡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럼 다음 차시에 공룡 테마를 기획해서 갖고 가는 거예요. 환아들이 처음에는 외부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큰데 취향저격 키트로 환아들 마음을 빨리 열 수 있었어요."
▲ SCV는 인하대병원에서 서울대병원으로 과학 봉사를 확장해서 활동 중이다
ⓒ 장유리 선생님
가장 기억에 남는 환아는 항암병동에 2년 넘게 입원해 있던 아이였다. 부모님 모두 직장에 다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아이는 퇴원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기다려온 퇴원날을 아이는 화요일에서 목요일로 미뤘단다. 환아가 기다린 사람은 'SCV 형'들이었다.
"저희가 매주 목요일마다 봉사를 가는데, 이 아이가 과학 봉사 형들에게 꼭 인사를 하고 가고 싶다고 퇴원을 이틀이나 미뤘더라고요. SCV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죠."
12명의 남학생과 함께하는 핑크빛 봉사
SCV가 봉사에 가지고 가는 과학 키트는 100% 자체 제작이다. 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키트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주지 않고 대주제만 제시한다.
"키트에 계절감을 살리는 편이에요. 12월에는 메리 사이언스, 윈터 사이언스가 주제예요. 특히 병실은 유독 더 어둡기 때문에 빛 관련 키트가 많아요."
학생들이 키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선생님은 개인 시간을 반납하고 12명의 학생들과 함께 서울로 전시를 보러가기도 했다.
"얼마 전에 서울 동대문 DDP에서 <럭스:시적해상도>라는 빛 관련 전시를 봤는데, 이걸 키트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수능 전날 수업이 일찍 끝날 때 애들을 데리고 서울에 가서 전시를 보고 왔어요. 이후에 빛 관련 키트 아이디어를 하나씩 내서 지금 연구 중에 있어요."
▲ SCV 학생들과 장유리 선생님의 단체 사진
ⓒ 장유리 선생님
▲ 벚꽃나무 앞에서 찍은 SCV 단체사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곳에서 장유리 선생님은 SCV 학생들의 단체 사진을 찍는다
ⓒ 장유리 선생님
장 선생님의 카카오톡 배경사진은 모두 SCV의 단체사진이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는 인생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고등학교 시절에 누군가를 도와줌으로써 얻는 행복을 알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선생님의 바람대로 학생들은 봉사가 '삶의 창문' 같다고 했다.
"고등학생은 학교에 박혀서 공부만 하고,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 해야 한다고들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나와 사회, 나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게 봉사인 것 같아요. 그래서 봉사로 살아있음을 느껴요." (배성호)
선생님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두 학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쳐다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은 제2의 가족이죠. 저희가 1주일에 1번, 1달에 1번 활동하는 게 아니라 매일 점심시간마다 활동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절대적인 시간으로 보면 저희 엄마보다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저희를 이끌어주는 형 같아요. 친구 중에 리더 같은 느낌이죠." (김한민)
그러자 이번엔 장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애들이 절 그렇게 생각해요. 누나도 아니고 형이래요."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물었다. '언제까지 SCV를 하실 건가요?'
"건강과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보람되고 즐거운 시간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