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전

홍콩 정청의 통역관 이낙산옹
  • 작성일1975.07.04
  • 조회수13
[중앙일보]

【홍콩=전육특파원】『인생 칠십이면 고래향이라는데 망향 50년이 서럽기만 하오. 고국에 돌아가서 뿌리를 내리고 살려고도 해봤소만은 내 생활환경이 여의치 않아 용기가 나질 않는구료. 아버지의 고국이 무언지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나 죽거든 고향 산천에 묻어달라」는 부탁이나 자주 할 따름이오.-』
50여년을 즐겨 마셨던 「비스킷」(백사길) 「브랜디」잔을 손에 든 「홍콩」의 노신사, 이낙산옹(70·일명 일화·향항구룡한구도8 지십호 한중대경11누C좌)의 눈에는 애수부터 젖어 든다. 17세에 고국을 떠나와 중국대륙에서 23년, 「홍공」에서 31년을 보낸 70 노인치고는 놀랄 만큼 기억력이 뚜렷하고 회상에 조리가 있다.

<부인과 함께 양재학원도 경영>
훤칠한 몸매에 순백의 머리칼을 곱게 빗어 붙이고 짙은 돋보기 너머로 세월을 응시하는 이옹은 파란만장한 자신의 생애를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한다.
중국대륙에서 영자지 기자, 세관 관리를 지내다 「홍콩」에 건너온후 홍삼 무역업에 손대 한때 재미도 봤으나 지금은 노령으로 사업에서 은퇴하고 부인(중국인)과 함께 양재학교를 경영하며 「홍콩」 정청의 공인통역관으로 1천여 교포들의 뒷바라지를 자진해 맡아하고 있는 노신사-.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그에게는 대체로 동남아에 살고 있는 재래교포들과는 색다른 「인텔리」의 멋이 풍긴다.
『10만「달러」를 가지고 1만「달러」를 벌기는 쉬워도 10「달러」가지고 1「달러」 벌기는 어려운게 장사』임을 강조하는 그는 자신을 비롯, 밑천이 없어 「홍콩」에 발붙인지 오래임에도 성공하지 못하는 우리 교포들의 처지를 가장 가슴 아파하며 어려웠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옹은 1905년 대전에서 출생, 개성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1922년(17세) 윤치호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던 선친(이영재)을 따라 중국 한구로 옴으로써 해외생활을 시작했다.
5남매의 장남인 그는 화중대학을 졸업한 27년 「센트럴·차이나·포스트」지의 기자가 되었으나 3년만에 그만두고 4천8백대1의 경쟁을 뚫고 당시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었던 세관관리가 되었다. 이곳에서 쌓은 15년의 경험이 그후 그를 무역업에 손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서 박해심해 홍콩에 피난>
그가 「홍콩」으로 온 것은 1944년. 중·일 전쟁의 와중에 한국인에 대한 박해를 견딜 수 없어 피난 온 것이다. 처음 그는 5백t급 화물선 1척을 영국인으로부터 인수, 광동·해남도·「마카오」 등지를 운항하며 중계무역을 했다.
당시 「홍콩」에는 1백30여명의 교포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자기 이름도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한 어부들이었다고 한다. 이옹은 자신의 수입을 할애, 교민회를 창립하고 한교증을 발부했다. 그후 그는 15년 동안 교민회장직을 맡아오며 「홍콩」에 「코리언·클럽」을 건립한 공적을 남겼다.
우리 교포들은 대부분 「홍콩」의 특수한 입지적 조건 때문에 영세성을 탈피하지 못한 상업이지만 무역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옹은 교포들을 자문역으로 도우면서 자신도 무역업을 했다. 당시 「홍콩」은 인구가 60만명(현재4백만명)에 불과했으며 모든 분야가 미개척 상태였고 게다가 일본인이 철수한 뒤라 우리 교포들에게는 여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별로 장사로 성공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이 적은데다 우선 손쉽게 고국과 손잡고 거래를 하려는 안이한 태도 때문이었다고 이옹은 회상했다.
이옹은 고국을 상대로 한국상품을 수입하고 「홍콩」의 한약재를 고국에 수출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었다. 한국상품은 자격변동이 심하고 본국 상사의 잦은 선적지연, 물건 바꿔치기로 번번이 낭패를 몰고 왔다.
이옹은 한때 홍삼과 생돈을 연간 2백만「달러」정도 취급해 봤으나 본국의 가격변동이 심해 계획을 세울 수 없는데다 중공의 「덤핑」까지 겹쳐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고 한번은 오징어를 수입했더니 포장 속에 쓰레기와 돌덩이가 들어있어 신용을 존중하는 중국상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59년 한덕공사를 차려 48만「달러」어치의 한약재 수출을 했으나 본국 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해 자신은 한푼도 손에 쥐지 못했다.

<"한국 더럽히지 말자" 캠페인도>
또 인정에 끌려 불과 수천 「달러」를 가지고 나와 수만 「달러」짜리 신용장을 개설해 달라고 부탁하는 본국 상인들의 보증을 섰다가 몇 번씩이나 판상 책임을 덮어쓰기도 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그는 고국에 돌아가는 것은 물론, 고국에서 오는 동포가 무서울 지경이 되었다. 때맞춰 이곳 교포사회에도 고국의 부조리가 즉각 영향을 미쳐왔다. 돈번 사람은 대부분 미국 등 제3국으로 가려는 경향이 생겼고 선의의 「홍콩」교포들의 자존심을 떨어뜨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른바 「홍콩」 교포는 「밀수장이」라는 「니크네임」이 그것이었다.
이옹도 잘 모르는 사이에 많은 교포들이 밀수에 손을 댄 것도 사실이었다. 몇 년 전 KAL기 「스튜어디스」가 낀 대규모 밀수 조직이 고국에서 적발되었을 때 여기에 연루된 교포 박 모씨가 이곳에서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목매어 자살한 사건은 그에게는 가장 「쇼킹」한 것이었다.
이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교민회를 소집. 『국가에 대해 공헌은 하지 못할지라도 너 자신의 이름은 더럽히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