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전

「미국의소리」<제60화>
  • 작성일1978.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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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년간 한문책을 읽던 나는 14세때 원산 보광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캐나다」선교사가 세운 중학과정의 학교였다.
우리 집에서 30리쯤 떨어져 있어 걸어서 통학하기에는 멀었다.
마침 학교에 부속된 조그마한 기숙사가 있어서 나는 쌀 두말을 지고가 자취를 시작했다.
8명이서 합숙했는데 내가 짓는 밥은 실거나 타기가 일쑤였다. 이 학교에서 나는 이른바 신학문이라는 것을 배우게됐다. 그때는 이미 일본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고 영어도 배웠다.
보광학교는 「캐나다」선교부에서 세운「미션·스쿨」이었는데 내가 입학한 올마뒤에 재경문제로 갑자기 함흥에 있는 영생학교에 흡수됐다.
나는 함흥으로 옮겨 영생학교4년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전문학교나 대학으로 진학하려면 5년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거나 검정고시에 합격해야했다. 대학진학을 꿈꾼 나는 개성으로 내려가 편입시험을 치르고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송도고보는 l906년 미국인선교사 「워슨」목사가 세운 학교로 처음에는 한영서원이라고 했다. 「워슨」목사는 송악산기슭 자기 집에 서원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년뒤에 학부의 설립인가를 받아 학생을 공개모집했다. 1908년10월3일 학생2백명으로 개교된 한영서원의 초대 원장으로는 윤치호선생님이 취임하셨다. 한영서원은 그뒤 총독부의 학제개편으로 사립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됐다.
그때 윤선생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영문법 교과서를 펴냈는데 우리는 그 책으로 영어를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 비준때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이었던 윤선생은 26세때 미국「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대학에 유학했다.
윤선생이 한영서원 원장이 된것은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는데, 잘 알려지지않은 사연이 있다. 윤선생이「밴더빌」대학을 졸업하면서 남은 학자금 3백 「달러」를 남감리교 선교부에 기부했다. 당시돈 3백 「달러」는 거금이었다. 이에 감동한 선교부는 윤선생을 불러 무슨 일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윤선생은 『내가 미국에서 두가지 새로운 것을 배웠는데 한가지는 민주주의요, 다른 한가지는 기독교 사상이다. 이제 내가 귀국하여 그 두가지를 우리민족에게 가르치려고 하나 힘이 부족하다. 바라건데 귀 선교부에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선교부는 윤선생에게「워슨」 목사가 세운 한영서원의 운영을 맡겼다.
내가 송도고보 졸업반이었을 때 국문학을 가르치던 이상춘선생과 음악을 맡은 정사현선생이 일제 경찰에 의해 구속됐다. 정선생은 이왕직 양악대에서「플룻」을 불던 분으로 이선생이 지은『선죽교 피다리』 라는 시에 곡을 붙였다.
이 노래는 당시 우리 학생들 사이에 널리 불려졌는데 일제는 그 내용이 불온하다고해서 두 선생을 구속하고 노래까지 금지 시켰다.
『선죽교 피다리 개성군 선죽교야 등포은 죽은지 묻노니 몇해냐 국사야 피흘린자 천만고에 남은 한이 다할 때 있느냐 옹수산 지는 해 말없이 넘어가고 선죽교 다리밑 물소리 목맨 듯 하구나 만월대에 슬피우는 저 두견성 참자를 끊는 듯.』
이런 가사의 노래였는데 해방될 때까지 전혀 부를 수가 없었고 지금은 대부분 잊혀지고 말았다.
우리 송도고보는 학제개편으로 고등과 2년, 중등과 4년, 초등과 4년으로 바뀌었고 송도고보로 개청되면서부터 초등과가 문리되었다.
윤치호 초대원장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한 윤치승씨는 사재 1만원을 털어 체육관을 겸한 강당을 건립했으며 그 뒤를 이어 미국인 선교사 신애도씨가 교장에 취임했다.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의 신교장은 1908년 선교사업차 우리나라에 나와 경성 중앙청년회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l922년에 송도고보에 교사로 왔으며 26년에 3대 교장에 취임했다.
이처럼 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선교사업과 아울러 육영사업에 힘을 기울여 나처럼 넉넉지 못한 집안의 자녀들도 신학문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송도고보를 졸업한 나는 가정형편상 금방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함흥으로 내려가 영생중학에서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게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