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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I의 태동에서 4자 협약을 성공적으로 인천시립미술관과 시립박물관을 이전하고 문화 산업 시설
인천의 새로운 이끌어내며 도시 개발 등을 구성해 인천시 문화의 요람지가 될 뮤지엄 파크를
문화·예술 구역으로
사업의 꿈은 재가동되는 꾸릴 예정이다. 또 OCI는 경인방송 건물과 옹진군청 인근
듯했지만 머지않아 또다시 지역을 인천시와 인천시 남구에 기증할 계획이다. 인천
위기가 찾아온다. OCI는 도시 개발 사업은 OCI가 태동한 땅에 새로운 복합 문화
1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07년도 도시 개발 인허가를 도시를 만들어 다시 인천이 도약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받은 바 있다. 이수영 회장은 싱가포르의 유명 기업인 이수영 회장의 뜻이 담긴 과업이다.
홍룽그룹의 도시 개발 회사 CDL(City Development
Ltd.)에 프러포즈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2008년 9월,
미국발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후폭풍으로 세계적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부동산 개발이 표류하자 CDL에서
1970년대 인천 소다회 공장 전경 인천 공장 내에 위치한 사택
투자를 중단한 것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2008년에 물적
분할을 통해 DCRE를 자회사로 설립했어요. 물적 분할은
본래와 다른 종류의 사업을 할 때는 모회사와 자회사를
새로운 인천 시대의 인천은 OCI의 태동이 된 규탄을 위한 시민협의회’까지 구성할 정도로 상당히 분리하도록 하는 제도로, 당시 정부에서 장려한 일이었죠.
개막, DCRE 지역인 만큼 이수영 곤란한 상황을 겪었으니까요.” DCRE의 박홍준 부회장이 그런데 2012년 1월에 인천시에서 물적 분할을 통한
회장에겐 특별한 의미가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기업 분리 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약 4,712억 원의 세금을 “
있는 곳이다. 1968년 이 문제는 2003년도에 인천시, 인천시 남구, 부과했어요.” OCI 홍보팀 오창우 상무의 설명이다. 이
동문이어서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이수영
이회림 명예회장이 이곳에 소다회 공장을 세우면서 시민 단체 대표, OCI(당시 동양화학) 대표자가 모여 사건으로 OCI와 인천시는 6년에 걸친 긴 법정 싸움을 회장이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을 때
인천과 인연을 맺은 OCI는 이곳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4자 협약’을 맺으며 일단락된다. 공장 용수로 쓰던 시작한 끝에 2018년 6월 3일 최종 승소하며 긴 논란의 나는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인천의 발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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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에 대한 책임 또한 다하고자 했다. 1996년 33만m 의 유수지에 건조된 폐석회를 매립하고 그 위에 마침표를 찍는다. 인천 도시 개발에는 이수영 회장이 대해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선대 회장
설립한 경인방송(iTV)은 그 시작이었다. 당시 여러 악재가 시민을 위한 공원과 체육 시설을 짓기로 한 것이다. 오랫동안 열망하던 꿈이 담겨 있다. 인천 시민을 위한 못지않게 이수영 회장 역시 인천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습니다. 인천 지역 사회의
겹치며 안타깝게 방송국 사업은 접었지만 그 일은 시작에 기업과 지방자치단체, 시민 단체가 모여 어렵게 맺은 주거 공간을 비롯해 문화 공간, 공원 등이 앞으로 10년에
난제였던 폐석회 문제를 4자 협약으로
불과했다. 이수영 회장은 2004년 문을 닫은 인천 소다회 이 4자협약은 환경문제와 지역사회 문제를 슬기롭게 걸쳐 서서히 현실화할 것이다. 비록 이수영 회장은 첫 2
원만히 처리하고, 공장 부지였던 188만m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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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부지 155만1,000m 를 문화 신도시로 바꾸기로 해결한 한국 행정 역사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환경법이 삽을 뜨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볼 순 없었지만 이 거대한
신도시로 탈바꿈할 계획을 세운 일은 정말
결심하고, 2008년에 인천시 도시 개발 사업을 위해 바뀌면서 산업폐기물로 지정된 부산물과 이를 처리하기 프로젝트의 여정은 그가 없었다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대단한 업적이죠. 또 시민의 교통 편의를
DCRE를 설립한다. 인천에 대한 이수영 회장의 새로운 위해 기업이 투자해야 하는 비용 등을 효과적으로 일이었다. 고려해 수인선 지하철 학익역을 건설하기
비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해결하기 위해 이수영 회장은 10여 년 넘는 시간 동안 공장은 전부 헐지만, 우리나라 건축학상 의미가 위해 780억이라는 거액도 투자했습니다.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집요하리만큼
1986년 환경법이 바뀌면서 석회 소다에서 나오는 고민했다. 인천시와 인천 시민을 위한 기업으로 남겠다는 있는 인천 공장 본관 건물과 사택은 기념관으로
인천에 대한 애착이 컸기에 신도시를
부산물인 폐석회가 산업폐기물로 지정된다. “소다회 의지와 막중한 책임감을 저버리지 않고 시민 단체 대표와 보존하기로 했다. 공장장이 살던 사택은 선교사들이
통해 지역 발전을 다시 한번 이끌고자 한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필수 부산물인 폐석회는 그때 끊임없이 대화하며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이로운’ 결론을 국내 최초로 라디오를 송출한 극동방송국(당시
것이었습니다.
동양화학의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어요. 이 문제를 이끌어낸 부분은 그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복음주의방송국)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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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하기까지 17년간 OCI는 인천에서 공공의 적이 이수영 회장은 이 건물 주변의 땅 약 4만6,280m 을
- 인천상공회의소 김정치 명예회장
되었죠. 인천에 있는 26개 시민 단체가 모여 ‘동양화학 인천시에 기증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인천시는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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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OO YOUNG 1942 – 2017 STORY 5. EMBRACING CHALLEN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