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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유학, 글로벌 감각을 익히다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벽에 부딪친 거죠. 두 나라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다 결국 귀국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수영 회장에게 미국 유학은 인생에서 중요한
                 간극이 크다 보니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여기에서 배운
                 것들이 허사가 될 수도 있겠다’라는 걱정도 많았고요.”
                                                                 터닝 포인트였다. 해외 유학 시절 쌓은 폭넓은 인적
 65              이수영 회장은 고민만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성격이                    네트워크와 글로벌 마인드는 이후 유수의 해외 기업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신사업을 발굴하는 데 발판이
                 아니었기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이듬해인 1966년
                                                                 되었다.
                 아이오와주립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 중 상당수는





 연세대를 졸업한 다음 해 이수영 회장은 곧바로 미국   일찍 유학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외국 잡지 구독은
                                                                         유학 당시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가 선택한
 유학을 준비한다. “오빠는 일생을 초지일관 높은 이상을   물론 영어 공부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뿐 아니라
                                                                         아르바이트는 아이스크림 장사였다. 당시
 추구했던 사람이에요. 미국 유학은 오빠에겐 꼭 필요한,   할머니 역시 거의 무학(無學)이었음에도 멀리 내다볼 줄
                                                                         뉴욕의 아이스크림 기계가 설치된 트럭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거예요. 중·고등학교 시절 저희   아는, 지혜로운 분들이었어요. 이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편배달용 차와 비슷했다. 김경자 여사는
 집은 <라이프>, <내셔널지오그래픽>을 구독했어요.   오빠의 남다른 열정은 이런 가족의 뿌리로부터 시작되죠.”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얘기한다. “장사하는
 이 잡지를 본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던 때였죠. 오빠는   이정자 여사의 말이다.
                                                                         날이면 트럭을 빌리기 위해 한 시간 넘게
 원래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이런 잡지나 책을   연세대에서 행정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에서도
                                                                         지하철을 타고 롱아일랜드까지 갔어요. 제일 잘
 통해 개화된 서구 사회와 문명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레   같은 분야를 좀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어 1965년
                                                                         팔리는 바닐라 맛 한 통, 초콜릿과 스트로베리
 생긴 것 같아요.” 이수영 회장의 동생 이정자 여사는   뉴욕대학교(NYU) 행정학과에 입학한다. 당시엔 유학을
                                                                         중 하나를 선택해 아이스크림 두 통을 실은
 유학은 이 회장이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 중   가려면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유학 시험에
                                                                         트럭을 몰고 뉴욕 시내로 나오는 거죠. 저녁
 하나였다고 말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꿈을   통과해야 비자를 발급했다. 유학 자격 요건을 정부에서
                                                                         7시부터 12시까지 시내를 돌며 아이스크림을
 좇는 삶의 태도는 3대에 걸쳐 이어져온 모습이다. 이회림   관리하는 것 외에도 외화 반출을 막고자 유학생들이
                                                                         팔았어요. 워낙 운전하는 걸 좋아해서
 명예회장은 나이가 들어서도 기회가 되면 외국에 자주   해외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금액을 100달러 이하로
                                                                         힘들다기보단 꽤 즐거운 일이었죠.” 아이스크림
 나가 신문물을 접하곤 했다. 자식들도 큰 뜻을 펼치려면   제한했다. 해외 송금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국에서
                                                                         트럭은 용돈벌이이자, 미국에서 같이 유학
 유학비를 지원해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수영 회장
                                                                         생활을 한 이수영 회장과 김경자 여사의 데이트
 역시 유학 생활이 풍족할 리 없었기에 학교를 가지 않는
                                                                         수단이기도 했다. 뉴욕 구석구석을 다녀본
 날엔 돈을 벌어야 했다.    이수영 회장이 유학을 떠나던 날. 공항으로 마중 나온 친구들과 함께.
 지금까지의 삶과 전혀 다른 유학 생활은   앞줄 왼쪽부터 이수명, 서덕선, 김풍렬, 김종익 뒷줄 왼쪽부터 김태환,         이때의 경험이 더해져 이수영 회장은 노년에도
                 한홍섭, 변정균, 이수영, 김영식, 오른쪽 끝은 이기만                          뉴욕 지리에 밝았다. “공항에 도착해 호텔로
 고단하다기보다는 흥미로웠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이동할 때 어떤 다리로 가달라, 이쪽을 거쳐
 만나게 된다. 아내 김경자 여사는 당시 이수영 회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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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그 사람이 뉴욕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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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던 때는 유학 생활 중 가장 고민이 많던 시기였어요.
 중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수업이 진행될수록 탄탄하고 폭넓게 지식을 다질
 되어서도 정기구독을 하며 즐겨
 보던 <내셔널지오그래픽>  수 있을 거란 기대와 달리 한국과 미국의 행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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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E SOO YOUNG  1942 – 2017                                                                  STORY 1.  THE EARL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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