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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군산 TDI 공장과 시련 돌을 던지고 차를 부수기도 했다. “젊은 분이 겁이 날 법도
한데, 이수영 회장님은 침착하게 주민들을 직접 만나며
해결을 위해 고심하셨습니다. 어떤 불량배들은 시위를
90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회사에 금품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정도가 아닌 일은 단호히 거절하셨어요. 한번은
일주일째 집에도 못 가고 일하는 저에게 러닝셔츠와
양말을 사 가지고 오셔서 감동받은 기억도 납니다.”
TDI 공장에서 근무했던 송암동우회 김상열 전 회장은
의연하면서도 세심했던 당시 이수영 회장과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이수영 회장을 필두로 동양화학 직원들은
이수영 회장이 가장 힘들어한 시기 중 하나로 군산 주민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덕분에
TDI 공장 타르 유출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회사가 여론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생산된 쌀을
하루아침에 악덕 기업이 된 상황이니, 평생 원칙과 전량 구매하고 가구당 피해 보상도 이루어졌으며,
정도를 중시하던 이수영 회장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의 공장은 안전장치를 더욱 보강했다. 군산 TDI 공장은
군산 주민들에게 TDI 공장 건설 추진에 관해 설명 중인 이수영 회장
시기였다. 환경 안정성 평가를 통과해 재가동하기까지 2년이라는
군산 TDI 공장은 1990년 6월 준공했다. 당시 건축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자칫 폐업할 뻔한 군산 TDI 공장은
단열재, 도료, 고무 접착제 등의 원료로 사용하던 TDI는 경영진을 비롯한 전 사원이 단합해 위기를 극복할 수
공급이 부족해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었기에 동양화학이 있었다. 이로써 동양화학은 인천 소다회 공장을 필두로
직접 생산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TDI 공장을 건설하는 한 무기화학(Inorganic Chemicals)에 이어 가성칼륨을
일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세계 생산하는 한국카리화학을 설립함으로써 정밀화학(Fine
각지의 문을 두드렸지만 허사였고, 천신만고 끝에 미국 Chemicals) 분야를 강화하고, TDI 생산으로
앨라이드 시그널(Allied Signal)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석유화학(Petrochemicals) 분야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방대한 옛 자료들만 인수할 수 있었다. 군산 TDI 공장은 마련하게 된다.
어렵게 얻은 기술 자료를 토대로 동양화학 기술진의
밤낮없는 수고와 노력으로 태동한 값진 결과물이었다.
TDI 제조 과정에 들어가는 포스겐(Phosgene)은
강한 독성을 띠지만 공정 중에 바로 소모되어 인체에는
무해했다. 하지만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되고 독가스탄의
원료라는 유언비어까지 퍼지면서 군산 주민들의 반대가
군산 TDI 기공식 모습
있었다. 그러던 중 실수로 공장 굴뚝에서 분출된 검은색
타르(Tar)가 흩날려 인근 벼에 묻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소식을 접한 이수영 회장은 급히 군산으로
내려갔지만 공장은 수많은 시위대로 둘러싸여 있어
진입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성난 시위대 중 일부는 회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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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OO YOUNG 1942 – 2017 STORY 2. EXPANDING BUSI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