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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소련과 동독 선수를 한국으로 초청하기도   대한체육회의 예산이 풍족하지 못하니까 전부 회장 개인    이 회장이 그걸 보고 안타까워서 삭빙기를 개발한 거예요.
 INTERVIEW  했는데요, 당시 사건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돈으로 운영한 거예요. 1989년도에 목동실내빙상장이   아마 동양화학 공장에서 만들어 왔을 겁니다. 트랙터에
 있다면요?           생겼는데, 이수영 회장이 선수 육성에 꼭 필요한 곳이니                  매달아서 쓰는 거였는데 본인이 설계도를 그려가며 손수
 장명희   아주 역사적인 일이었죠. 일본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우리가 여기를 운영해보자고 제안해서 아이스하키연맹과   제작했어요.
 아시아빙상경기연맹 회장   대회를 마친 선수들을 바로 한국으로 데려오면 언론에   공동으로 법인을 설립했죠. 당시 아이스하키연맹이 돈이
 대한빙상경기연맹 명예회장
 노출되고 북한에서 방해 공작을 할까 봐 홍콩을 거쳐   없어서 5,000만 원을 이수영 회장이 빌려주고, 나머지   선수들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데 이수영 회장이 강력히
 한국으로 들어오도록 ‘작전’을 짰어요. 선수들이   5,000만 원은 자신이 부담했어요. 그렇게 1억짜리 법인   내세운 원칙이 있었나요?
 홍콩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잘 타고 문제   관리 회사를 만들어 서울시와 계약하는 일까지 모두       이수영 회장은 가능성 있다고 누구를 더 밀어주지는
 없이 출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언론에 공개했죠.   이수영 회장이 추진했습니다.                않았습니다. 다만 불우한 가정이나 환경에서 자란
 태릉에서 시범 경기를 하려는데 의자가 없어서 새로                                     선수들을 많이 챙겨줬죠. 귀가 잘 안 들리는 등 장애가
 만들고, 화장실이 너무 열악해서 임시로 리모델링하고   사비를 들여 국내 최초로 빙판을 고르는 삭빙기를       있거나 흑인과 혼혈인 선수도 곁에서 많이 돌봤어요.
 바닥에 카펫을 깔았어요. 이수영 회장의 임기응변이었죠.   개발하기도 했다고요?
 그걸 보고 선수들은 ‘Korea wonderful’이라고   경기도 포천 산정호수에서 시합을 많이 했는데, 우리가   이수영 회장이 빙상연맹 회장으로서 가장 기뻐했던
 극찬했지요.          직접 밤새 얼음을 만들곤 했죠. 시합 전날 호수에 물을                  순간은 언제인가요?
                 뿌리고 넓적한 삽으로 평평하게 깎아내는데 너무 추워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 당연히 기뻐했지만 메달을 못
 이수영 회장이 스포츠 외교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소주를 박스로 갖다 놓고 마셔가며 할 정도였어요.    따더라도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것을 더 좋아했어요. 이 회장은 본인 역시 일이 성사가
 국제빙상경기연맹 사람들하고 화합하기 위해 애쓴                                       되든 안 되든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었고, 열 가지 목표가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동계스포츠가 국제 무대에                                     있다고 하면 그중 한두 개만 성공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오를 수 있었죠. 저를 국제빙상경기연맹에 추천해준                                     사람이었죠.
 덕에 20년간 ISU 이사를 맡고 있고, 지금까지
 아시아빙상경기연맹 회장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잊혀지지 않는 이수영 회장의 모습이 있다면요?
 이수영 회장은 사람을 잘 챙기고, 또 정직한 걸 제일                                   이수영 회장이 세계 선수권 대회를 준비할 때 만든 모자가
 좋아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정행위를 하면 다신 안                                     있어요. 빙상연맹 회장직을 퇴임한 후에도 국제 대회만
 봐요. 꿈도 매우 컸죠. 한국 빙상 실력이 세계 수준으로                                 하면 꼭 그 모자를 쓰고 나왔죠. 색이 다 바랬는데도
 올라가는 게 꿈이었고 그렇게 실현한 것 또한 사실이에요.                                 밤낮없이 쓰고 다니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동계스포츠에 대한 이 회장의 애착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이수영 회장이 19대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에   당시 빙상연맹은 예산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취임할 때 부회장을 맡기 시작한 장명희   하는데, 이수영 회장은 이러한 난국을 어떻게 해결했나요?
 아시아빙상경기연맹 회장은 15년간 이수영
 어디서도 지원받지 못해서 전부 이수영 회장의 개인
 회장 곁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돈으로 운영했어요. 빙상 스포츠가 발전하는 데 쓰는
 이수영 회장이 특유의 따뜻함과 도덕성을
 돈은 아끼지 않았죠. 필요한 건 다 쓰되 대신 낭비는 절대   한국 아마추어 스케이트 협회(Korean Amateur Skating
 바탕으로, 빙상연맹을 세계적 수준으로   Association)의 약자가 적힌 모자. 이수영 회장이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모든 순간을 또렷이   싫어했어요. 요새는 빙상연맹의 예산 85%를 국가에서   대한빙상경기연맹을 맡을 당시 제작한 것으로, 30여 년이
 기억하고 있다.   지원하고 나머지 15%만 회장이 해결해요. 그때는   넘도록 겨울이면 이 모자를 즐겨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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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E SOO YOUNG  1942 – 2017                                                                    STORY 3.  INNO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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